몽골여행 :: 홉스골에서 알아버린 승마의 재미
새벽비가 홉스골에서의 아침을 알렸다. 게르 위로 떨어지는 둔탁한 빗소리는 거세고 강했다. 전날 날씨 예보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비가 떨어지니 아쉬운 마음이 컸다. 일정이 틀어지거나 취소되는 건 아닌지 걱정도 앞섰다. 다행히 오전에는 먹구름이 가득하다 오후부터 해가 나왔다. 이른 아침 홉스골은 초겨울 같은 날씨였다. 늦은 하루를 시작하기로 했는데 아침 샤워는 포기할 수 없어 일찍이 눈을 떴다. 그동안의 내공으로 빨리 샤워를 하지 않으면 얼마나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지 가늠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침 시간은 오전 9시로 늦춰졌지만(보통 7시반에서 8시쯤 먹었다.), 그동안 일어났던 대로 6시50분쯤 일어나 샤워를 마쳤다.
일정은 오전 보트와 오후 승마뿐이었다. 밥과 일정 사이로 자유시간이 펑펑 남았다. 그 덕에 경치를 즐기고 추억을 사진에 담고 여유로이 낮잠도 즐길 수 있었다. 오전의 홉스골은 구름이 가득해 해가 없고 추웠다. 나름 여행지에 왔다고 다들 예쁘게 차려 입고 싶어했는데, 예쁜 옷을 입더라도 외투로 꽁꽁 싸매지 않으면 추위를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긴 가을 원피스를 입고 경량패딩 조끼와 가디건을 겹쳐입었다. 우리는 나름대로 패션과 사진을 택하고 추위를 감내했지만, 다른 팀은 세상 편하고 따뜻하게 입고 나타났다. 팀의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는 점이 웃겼다.
“와, 여기는 진짜 바다라고 해도 믿겠다.”
홉스골은 참 넓다. 호수인데 무심결에 바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관광객의 입에서 툭툭 나오는 말이다. 소원 섬으로 향하는 보트는 약 10분 정도였다. 찬바람을 가르고 도착한 소원 섬은 다소 어두운, 흑빛의 에메랄드 색 호수에 둘러싸여 있었다. 절벽 바로 아래 맞닿은 호수의 바닥은 역시 투명하게 내다보였다. 소원 섬과 보트는 특별할 게 없었다. 다만 보트를 타도 머리에 소금끼가 남지 않아 머리결을 지킬 수 있었다는 점은 좋았다. 소원 섬의 절벽에서 기념 사진을 남기고 뭍에서 물수제비를 던지며 놀다가 다시 보트에 올랐다. 짧은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우리팀 여자들은 다 같이 점심 전 단잠에 빠졌다가 식사에 지각했다.
“물빛이 완전 에메랄드야. 완전 푸켓섬 바다 같아.”
홉스골의 정점은 승마다. 오후의 홉스골은 따스한 햇살 아래 선명한 에메랄드 색을 품고 있었다. 하늘은 높고 초원은 더욱 푸르렀다. 해가 드러나니 초가을의 한낮처럼 햇빛은 따뜻하고 공기는 차가웠다. 승마를 위해 긴 청바지를 입고 웃옷은 긴 팔에 바람막이를 가볍게 걸쳤다. 춥거나 덥지 않은 딱 활동하기 알맞은 날씨였다. 승마 전 산책에 나선 우리는 아름다운 홉스골을 마주하고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사진을 한장씩 찍어댔다. 사진은 어떤 방향이든 찍기만 하면 다 작품 같이 나왔다. 그림 속을 걷는 나를 찍은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평화롭고 여유로운 승마, 이날을 위해 그동안의 여정을 밟아온 건가 싶을 만큼 홉스골 호숫가를 따라 말을 타는 행복은 기대 이상이었다. 오른쪽으로는 빛나는 호수, 왼쪽으로는 울창한 숲, 그 속에서 말을 타는 우리, 조화로운 삼박자가 인상 깊은 추억을 남겼다. 나는 우연히 숲 속에서 우리를 앞질러 가는 야크 가족을 영상에 담았다. 아무래도 이번 몽골여행에서 남긴 최고의 영상이 아닐까 싶다. 승마를 하며 찍은 사진을 열어보니 모두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거나 활짝 웃으며 승마를 즐기고 있었다. 그동안의 고생은 모두 잊은 얼굴들이다.
승마는 약 한 시간동안 이뤄지지만, 풍경을 즐기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두 마리당 한 명의 몽골인이 우리의 말을 잡고 같이 승마를 하는데, 말은 대부분 걷지만 종종 뛰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엉덩이가 들썩대고 긴장돼 고삐를 세게 쥐었다. 나는 낙타보다 말 타기가 더 재밌었다. 그런데 승마에 요령이 없다보니 우리 는 모두 말에서 내려 앓는 소리를 내야 했다. 엉덩이나 쿵쿵 찌이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무릎이 정말 아프다. 나중에 들어보니 말이 달릴 때 무릎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무릎을 세우고 반쯤 일어난 자세로 타야 한단다. 우리는 아무도 모른 채로 말에 올랐다. (말에서 내린 후 가이드 님이 알려줬다.) 물론 알고 타도 말 위에서 일어서기가 쉽진 않았을 거 같다.
반전이 있다면 말도 낙타만큼 파리가 많다. (아무래도 파리를 동반하지 않는 동물은 없는 것 같다.) 말은 때때로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며 마치 리듬을 타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는데, 이건 얼굴에 붙은 파리를 쫓기 위한 행동이다. 몽골은 말과 소가 사람 수보다 많아서 그런지 유독 파리가 많다. 전기 파리채를 가져온다면 이보다 유용하다고 느낄 도구가 없을 거다. 다만 홉스골 만큼은 말 근처를 제외한 대부분의 장소에서 파리를 거의 만나지 못 했다. 심지어 물가도 아주 깔끔하다. (앞서 적었지만 테르힝 차강 호수의 물가는 벌레 대환장 파티다.) 숙소에도 거미와 개미가 있을지 언정 날벌레는 전혀 없었다. (너무 행복했다.) 날씨가 추운 덕인가 했다.
“몽골 와서는 덥거나 추워서 중간에 맨날 깨. 편히 잔 적이 없어.”
그런데 날씨가 추운 탓에 사람의 활동도 제한적이다. 매일 같이 샤워를 하던 우리는 숙소와 떨어진 (그래도 가까운 편인) 공동샤워장에 가기를 포기하고 침낭 속에 몸을 구겨넣기 바빴다. 그동안 침낭을 쓰지 않던 팀원들도 하나 둘 침낭을 꺼내기 시작했다. 홉스골로 향하는 여행지는 밤이 춥긴 하지만, 침낭 없이도 잘만 하다는(혹은 춥지만 귀찮아서 그냥 잔다는) 팀원들이 더러 있었다. 그런데 홉스골에서만큼은 모두가 침낭과 난로에 의지하며 밤을 보냈다. 다만 그럼에도 영상권인지라 (한밤 기온은 8도였다.) 불을 떼우면 침낭이 덥고 불이 꺼지면 침낭을 싸매야 했다. 편차가 크다보니 홉스골에서는 그동안 밤에 깨는 불상사(?) 없이 잘 자던 나조차도 중간에 깨서 침낭을 고쳐 입었다.
홉스골에서의 마지막 밤이 찾아오자 여행의 끝자락을 실감했다.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별 구경을 포기하고서 우리는 식당에 모여 앉아 시원한 맥주를 한캔씩 땄다. 큰 탈 없이 저물어가는 몽골과의 만남이 감사하고 아쉬우면서 편히 씻고 누워 잘 수 있는 우리집이 그립기도 했다. 아직 여정이 끝나지 않은 만큼 남은 나날들을 더 알차게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밤을 보냈다. 그런데 다음날 홉스골의 평화와 맞바꾼 대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